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에 기반하여 작성된 감상글입니다.
결론 : 극호 중호 소호 소불호 중불호 극불호
"나는 쓸모없는 사람일까?"
한 고등학교 교실의 쓰레기통에서 주인 모를 유서 내용의 편지가 발견된다.
대입 시험을 앞두고 교감은 이 일을 묻으려고 하고, 정 선생은 우선 이 편지를 누가 썼는지부터 찾아보자고 한다.
"일기야, 안녕? 오늘부터 매일 일기를 쓰기로 했어"
편지와 학생들의 글씨 모양을 비교하던 정 선생은 편지 속 한 문장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오래된 일기장을 꺼내 든다.
열심히 쓰다 보면 바라던 어른이 될 거란 믿음으로 써 내려간 열 살 소년의 일기.
정 선생은 일기를 읽으며 묻어뒀던 아픈 과거와 감정들을 마주하고, 학생들을 위해 마음을 열기 시작하는데…
영화의 줄거리와 대표 스틸컷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연소일기>는 이른 학업 스트레스로 인해 심리적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 어린 아이와 아이들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한 선생님의 이야기로 보여진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니, 단편적으로 스토리를 정리하자면 잘못된 내용은 아니지만 따지고 보면 내가 보고 느낀 스토리는 위 내용이 주가 아니었다.
나는 보통 '공포' '스릴러' '미스터리' 장르가 아니면 정말 명작이라고 떠들썩한 작품(예를 들면 <괴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같은)이 아닌 이상, 크게 관심이 가지 않는다. <연소일기>는 이런 예외 중에 한 작품이었다. 11월 13일 개봉날 한참 전부터 포스터 디자인과 스틸컷에 나온 분위기, 스토리 등에 흥미가 생겨 '꼭 봐야지'라는 생각으로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이유인 즉슨,
1.
소년의 굳은 표정이며, 시선 처리, 낮게 가라앉은 분위기, 영화 제목의 배치, 색감 등 꽤나 완벽한 포스터 디자인이라고 생각했다. 특히나 짙은 새빨간 배경색은 옛 홍콩영화의 눅눅한 분위기를 그대로 담아내는 듯한 느낌을 주어 직관적으로 호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2주차 포스터는 색감이나 인물의 배치 자체가 조금 더 여백이 느껴지기는 하나, 이미지에 집중된 1주차 포스터보다는 확실히 영화의 내용이나 메시지 자체를 전달하기에 더 효과적이라고 느꼈다.
소년의 얼굴에 집중하여 복합적인 심리를 드러내는 방식과 소년이 처한 환경을 기반으로 심리를 추측하게 하는 방식이 각각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어 흥미롭기도 했다.
2.
위 두 가지의 스틸컷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학교/학업의 상징성을 갖고 있는 의자의 완벽한 배치와 그 가운데 텅빈 공간으로 인해 역으로 압박감을 온몸으로 받고 있는 듯한, 나선형의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 중심에 서 있음으로써 혼자서는 쉽게 파악할 수 없고 답을 찾기 어려운 현실에 처하고 있을 서사를 가늠하게 하는 주인공의 스토리가 너무 궁금했다.
3.
익히 알고 있겠지만, 홍콩 영화는 현재 왕가위 감독의 작품들로서 존재감을 잇고 있을 뿐 최근에 이르러 입에 오르내릴 만한 명작이 딱히 보이지 않았다. 홍콩 영화 특유의 시그니처로 다시금 부상할 수 있는 작품이 기대되는 타이밍이었고, <연소일기>가 그러한 입지를 다지고 있다는 기사를 접하게 되어 더욱 기대하게 되고 말았다.
포인트1. 등장인물이 처한 갈등상황을 다루는 방식
극 초반까지는 주인공이 겪는 학업 스트레스/가정폭력, 정 선생이 겪는 직장 스트레스/유서 쓴 학생에 대한 걱정, 학생들 사이에 만연한 학교폭력/방관 등 '학교'라는 공간에 존재할 수 있는 '불행'들을 그저 가볍게 늘어 놓는 수준이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으나 결말에서 어느정도 수습하는 연출을 보니 다행히 불쾌감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보통 이렇게 다양한 인물들의 여러 갈등상황을 나열하다보면 어느 하나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감독 마음대로 취사 선택하여 실제 그러한 불행을 겪고 있을 사람들에 대한 예의 없이 나몰라라 하는 경우가 있기 마련이다. <연소일기>는 각 에피소드를 가볍게 여길 의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나 결과적으로 어느 하나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어찌저찌 수습하여 마무리한 정도에 불과했다.
여느 등장인물보다도 학생들에 대한 정성이 가장 부족했다고 본다. 주인공의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학생들의 서사를 가볍게 이용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유서를 쓴 학생은 어떤 심리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나? 그저 지나가는 성장통이었나? 옆학교의 죽은 학생은 뭔가? 왜 옆학교 얘기를 하면서 우리 학교에서 일어난 유서를 언급하지? 빈센트는 학교에서 대놓고 폭력을 당하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그렇게 지나가나? 그렇게 오래 고통 받았는데 마지막 인사 하나 했다고 치유가 되나? 등...
포인트2. 각 나이대의 감정, 경험에 대한 고증
개인적인 경험에 빗대어 생각하자면, 나 또한 주인공과 비슷한 나이대에 심각한 우울을 경험했었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는 어느 정도였는지 정확히 기억 나지도 않고 희미한 감각일 뿐이지만, 그 당시의 내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감정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서도 우울을 받아들이는 나의 심리적 대처방안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힘든 감정을 받아들이고 감내하는 내 방식은 주인공과 너무나도 달랐다. 극중 아버지에게 훈육이라는 핑계 아래 심각한 폭행을 당하고, 어머니에게 다정함을 조금씩 경험하다가 한번씩 감정적으로 심하게 상처 받고, 유일한 또래인 동생에게 기대보고 싶지만 늘 무시 당하는 주인공은 '애착인형'과 '만화책 속 대사'만으로 희망을 갖고 삶에 임하는 어찌 보면 과하게 순수한 반응을 보인다. 작품 곳곳에 나오는 주인공의 나레이션도 어린 아이답게 늘 밝다. 유소년 시절에 겪는 우울증을 더욱 깊게 표현했다면 영화 분위기와도 더욱 어울려 효과적인 메시지를 던질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동심'을 <연소일기>만의 방법으로 효과적으로 연출하고 싶으셨을 것으로 판단된다. 어린 주인공까지는 나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좁혀진 시선을 접어두고 납득해볼 수는 있다. 각자의 방식은 충분히 다를 수 있고 감독님께서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부분을 통해 고증하셨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정 선생이 학창시절 우연히 만난 연인 또한 인형을 좋아하고 혼자 목소리 내고 논다는 설정은 과하지 않았나 싶다. 아무리 더빙하는 걸 좋아하고 어른이 되어 어엿한 성우로서 전문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알 거 다 아는 학생이 혼자 놀 때 인형을 가지고 그렇게 논다는 건 조금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인 플롯에 있어 사소한 영향을 끼치는 부분이지만, 나는 이러한 사소한 디테일에 거슬리면 작품 전체에 의문을 가지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 같다.
포인트3. 눈에 띈 연출 방식들
- (위 맥락에서) 아내한테 남자애 목소리를 왜 내냐며 단순히 로맨스를 연출한 줄 알았던 장면이 마지막에 서사 다 풀어지고 감정이 짙어질 때 주인공의 일기장을 읽는 포인트로 활용한 방식은 매우 인상적이었다(positive).
- 처음 유서를 발견하고 어떤 학생이지? 찾아 나서는 정 선생이 한 명 한 명 바라보며 그 학생의 목소리로 유서의 한 대목을 읽고, 또 다른 학생이 읽음으로써 유서 내용이 완성되는 연출은 매우 좋았다.
- 당연하게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의 정 선생이 동일시되는 연출로 쭉 이어지는 줄 알고 왜이리 뻔하게 연출하지? 싶었는데, 한 번에 주인공의 동생으로 뒤집는 연출 타이밍이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나 같은 경우에는 이 씬 직전까지도 정 선생이 동생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은연중에 영화를 무시하게 되던 내 마음이 어린 정 선생이 주인공을 무시하고 은근히 자기만족감을 충족했던 것과 연결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다(positive).
- 엔딩 장면도, 엔딩으로 향하는 빌드업도 너무 내 취향이 아니었다.
주인공에게 무자비한 물리적/심리적 폭력을 일삼았던 아버지는 죽을 때 돼서 갑자기 왜 추억팔이를 하는 것이며, 이걸 왜 감정 해소의 절정 씬으로 활용했으며, 그렇게 피아노 가지고 뭐라고 뭐라고 했으면서 라디오 망가질 때까지 돌려 듣고 있었다는 게 작위적인 후회로 느껴져서 별로였다. 아버지를 간접적으로 용서하는 감독님의 연출로 느껴졌다면 너무 내 비약일까? 그 시기에는 등장인물 각자의 어려움이 있었으며 다들 어쩔 수 없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는 주인공으로 시작하는 작품, 그러한 주인공의 옛 심정을 이해해보려 하는 정 선생의 현재 장면과 함께 수미상관으로 마무리되는 건 예상도 쉽고 포용도 가능한 엔딩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주인공이 왜 나와...? 애초에 판타지도 아니고 현실고발에 가까운 메시지를 쭉 던지다가 지금의 정 선생과 어린 시절 형(주인공)을 둘의 추억 아닌 추억이 존재하는 옥상에서 마주하는 연출이 너무 별로였다(negative). 그래도, 대사 없이 표정만으로 두 인물의 복합적인 심리를 다시금 느낄 수 있도록 마무리해준 연출은 괜찮았다.
- 스틸컷과 다른 분위기의, 대부분의 컷들이 과도하게 흔들리고 불안정하도록 연출한 부분도, 전체적으로 가벼운 분위기로 연출되어 무거운 주제를 보고 나왔음에도 마음 속에 무겁게 남은 것이 없었던 것도, 각 등장인물마다 심리적인 충격을 받을 때 삐ㅡ 소리로 일차원적인 본능을 건드려 심리적 불안을 조성하는 연출도 크게 취향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무속인(無屬人)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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