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상/영화리뷰] 수려한 이미지로 전하는 강렬한 메시지, <콜레트>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에 기반하여 작성된 감상글입니다.

프랑스 생 소뵈르 작은 마을의 소녀 콜레트.
바람둥이 소설 편집자 윌리와 사랑에 빠져 파리에 왔지만 기대만큼 행복하지 않다.
파리의 콧대 높은 사교계와 화려하기만 한 물랑루즈에 지쳐갈 무렵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윌리의 부탁으로 자신의 경험을 녹인 소설을 쓰게 된다.
콜레트의 소설은 남편의 이름으로 출판되어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급기야 소설 속 주인공 이름을 딴 브랜드까지 런칭, 모든 상품들을 완판시키며 신드롬을 일으킨다.
패션, 헤어스타일까지 유행을 이끌며 최고의 인플루언서가 되지만 모든 성공과 명예는 남편 윌리에게 돌아간다.
남편 뒤에 숨어있던 콜레트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로 결심하는데…

<콜레트>의 오프닝 시퀀스는 이렇게 시작된다.
위 사진에서 타이틀이 함께 뜨고, 인물이 누워 있는 오른쪽으로 패닝하며 동시에 거울에 시선이 집중된다.
부드러운 카메라 워킹을 통해 공간 정보를 찬찬히 설명하고, 자연스럽게 배경처럼 있던 소품에서 다음 인물이 제시된다.

자막 또한 <콜레트>의 고전적이고 차분한 아름다움에 한 몫 한다.
화면과 동떨어지지 않는 조화로움이 돋보인다.

'윌리'와의 결혼을 결심한 이후 처음 참석하는 무도회에서 어색하게 사람들과 인사하며,
지극히 관조적인 제3자의 시선으로 사람들을 훑는 '가브리엘'의 동선과 함께 움직이는 카메라 워킹이 매우 깔끔하다.
수많은 관계가 뒤얽혀 있는 공간에서 나만 동떨어져 있는 오묘한 느낌을 완벽하게 표현했다.


시골에 살며 자연을 사랑했던 가브리엘은 도시에서 사람들 사이에 파묻히기를 반복하는 윌리의 일상에 따라갈 뿐이다.
자연스럽게 '자신'을 잃어간다.
하물며 창문에 이름을 새기는 시덥지 않은 무의식에 기반한 행동을 하면서도
본인의 이름이 아닌 남편의 이름을 새기고 있으니 말이다.




일부러 인물과 인물이 직접적으로 대면하지 않는 듯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연출 또한 인상적이다.
실제로 두 인물이 같은 공간에 있고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진행되는 장면임에도,
상을 반사하는 거울을 통해 두 인물을 분리하며 우리가 보고 있는 소통은 허상일 뿐이라고 표현하는 듯하다.



윌리의 외도를 목격한 이후 가브리엘은 반복되던 일상과 더불어 무언가 옳지 않음을 절실히 느낀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와 엄마에게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아름다운 자연풍경과 고전명화 같은 화면 구도들,
여백 활용도와 인물 배치의 완성도가 감탄스럽다.






가브리엘의 손에서 탄생한 콜레트가 진정 가브리엘의 콜레트로 인정받기까지,
수많은 관문들이 있었고 그 모든 난관을 넘은 가브리엘은
더이상 그 누구도 깨트릴 수 없는 벽을 견고히 다진 것이다.
자신을 쥐락펴락하듯 굴었던 윌리 또한 예외는 없다.

자신을 가두고 있던 알을 깨트리고 나온 가브리엘,
언제나 그의 총명함에 기대어 자신만만하던 윌리는
이제서야 스스로를 잃은 채
후회하고 또 분개하는 틀에 갇혀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죽을 땐 다른 데서 죽겠지'
*
'너는 낯선 도시에서 이방인으로 존재하는 것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 여행을 했다.
...
너는 도시의 흐름 한가운데 가만히 서서 머물러도 아무도 놀라지 않는 공공장소들을 좋아했다.
군중은 너의 익명성을 보장했다.
소유권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 에두아르 르베, 『자살』
영화 속 문장과 위 글귀는 아주 다른 장르에서 나온 문장이지만 같은 분위기를 담고 있다.
적어도 내가 느끼는 기준 안에서는 동일한 질감을 가지고 있다.
자유로움과 허무함이 한 데 섞여 있다.
한 곳에 얽매이지 않고 어디든지 움직일 수 있다는 자유로움과,
셀 수 없는 개체 속에 스며들어 사라질 수 있다는 허무함이.
무엇도 나자신을 잡아둘 수 없는 그 방랑자의 특성이 오히려 후련한 고양감을 만들어낸다.
이 문장은 영화 <콜레트>의 플롯 뿐만 아니라 작가 콜레트의 중심이 된다.


무속인(無屬人) 백